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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어떤 인물일까?

by 심토리니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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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W. Bush

초기 생애와 가족 배경

 

출생과 어린 시절

조지 워커 부시는 1946년 7월 6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미국의 가장 저명한 정치 가문 중 하나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바바라 피어스 부시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출생 시점은 아버지가 예일 대학교에 등록했을 때와 겹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 조종사로 복무한 이후였습니다.

 

조지 W. 부시는 1948년에 가족과 함께 텍사스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 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가족은 텍사스주 미들랜드에 정착했습니다. 이주한 텍사스에서의 생활은 부시의 성격,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Prescott Sheldon Bush (1895 - 1972)

가족 유산과 부시 정치 왕조

부시 가문은 미국 정치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지 W. 부시의 할아버지, 프레스콧 부시는 코네티컷주 상원의원이자 저명한 은행가였습니다. 프레스콧 부시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은 부시 가문의 정치적 상승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조지 H. W. 부시는 조지 W. 부시의 아버지로,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텍사스주 하원의원, 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CIA 국장, 그리고 가장 유명하게는 제41대 미국 대통령(1989–1993)을 역임했습니다. 부시 가문의 공직 수행 유산은 조지 W. 부시가 정치 경로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육과 청소년기

조지 W. 부시는 미들랜드 공립학교를 다닌 후,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에 진학했습니다. 필립스 아카데미에서의 학업 성적은 평균적이었으며, 부시는 자신이 "C 학점 학생"이라고 농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 특히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학교에서 학생회장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1964년에 부시는 예일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는 그의 아버지와 같은 경로를 따랐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의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델타 카파 엡실론 프라테리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역량을 쌓았습니다. 또한, 그는 비밀스러운 사회인 스컬 앤 본즈에 가입했습니다. 예일에서의 경험은 부시에게 사회적 기술과 리더십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예일 졸업 후, 부시는 1968년에 군 복무를 고려했으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복무를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군 방위군에 지원했습니다. 그는 F-102 델타 다거 전투기를 조종했으며,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부시는 그 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으며, 1975년에 졸업했습니다. 하버드에서의 시간은 부시가 더 집중적이고 훈련된 인물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후 그의 비즈니스 경력과 정치적 야망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석유 산업에서의 초기 경력

MBA 취득 후, 조지 W. 부시는 텍사스로 돌아와 석유 산업에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77년, 그는 자신의 석유 탐사 회사인 아부스토 에너지를 설립했습니다. 아부스토는 미들랜드에 본사를 두었으며, 이 시기에 부시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아부스토 에너지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석유 시장 변동성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84년, 회사는 스펙트럼 7과 재구성되었고, 부시는 계속해서 석유 산업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 시기는 부시의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확장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팀

1989년, 부시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투자자 그룹에 합류하여 팀을 구매했습니다. 그는 팀의 총괄 파트너로서 야구팀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부시의 리더십 아래에서 팀은 새로운 경기장인 알링턴의 볼파크를 확보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부시의 경영은 팬들과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팀을 1998년에 매각하면서 상당한 재정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부시의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연관은 그가 텍사스에서 높은 인지도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더욱 진지하게 갖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상승

 

초기 정치 야망

조지 W. 부시의 첫 정치적 도전은 1978년, 텍사스 19지구 하원의원 선거에서의 출마였습니다. 그는 민주당의 켄트 핸스에게 패배하였으며, 이 패배는 그가 정치에서 한동안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비즈니스 경력에 집중하며 가족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통해 관계를 쌓았습니다.

 

텍사스 주지사 (1995–2000)

1994년, 조지 W.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당시 텍사스 정치 환경은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고, 부시는 그 흐름에 발맞춰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가치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 보건, 이민 등의 문제에 대한 더 공감적인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부시는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며, 이후 1998년 재선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주지사 시절 교육 개혁, 세금 감면, 법정 개혁 등의 주요 정책을 추진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확립했습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출마

1999년에 조지 W. 부시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보수주의"를 강조하며, 전통적인 보수 가치와 공감적인 접근을 결합한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그의 캠페인은 교육 개혁을 포함하여 다양한 주요 정책을 제안했으며, 그는 주요 공화당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Al Gore

논란의 선거 결과

2000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부시는 민주당 후보 앨 고어와 경쟁하였으며, 플로리다 주의 선거 결과가 선거의 승패를 결정지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불확실했고, 플로리다에서의 투표는 법적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부시 대 고어 사건에서 플로리다 주의 재검토를 중단하였고, 이로 인해 부시가 플로리다의 선거인단 표를 확보하여 대통령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부시는 선거인단에서 271표를 얻어 승리했지만, 일반 투표에서는 고어에게 50만 표 이상 뒤졌습니다.


 

경제성장 및 세금 감면 조정법

첫 번째 임기 (2001–2004) (계속)

 

주요 국내 정책

조지 W. 부시는 2001년 1월 취임 후 주요 국내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주요 입법 성과는 2001년에 통과된 경제성장 및 세금 감면 조정법으로, 이 법안은 대규모 세금 감면을 통해 경제를 자극하고 남은 재정 흑자를 납세자에게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정책은 2003년 일자리 및 성장 세금 구제 조정법과 함께 부시의 주요 정책 중 하나로, 공급측 경제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반영하였습니다.

 

교육 개혁은 또 다른 중요한 정책 분야였습니다. 그는 의회와 협력하여 2002년에 아동낙오방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은 공립학교의 학생 성취도를 높이고, 표준화된 시험을 통해 학교의 성과를 평가하며, 연방 정부의 기준을 충족하는 학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법안은 학업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표준화된 시험의 의존과 학교에 부과된 부담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America is under attack’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부시 대통령의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이었습니다. 알카에다의 대원들이 4개의 상업 비행기를 납치하여, 두 대를 뉴욕시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하나는 펜타곤에, 나머지 하나는 펜실베이니아의 들판에 추락시켰습니다. 이 공격으로 약 3,000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시는 그날 저녁 국민에게 연설하였고, 미국이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숨겨주는 국가를 구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외로 큰 충격을 주었고, 부시는 강력한 반응을 보였으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

9/11 테러 공격에 대한 응답으로 조지 W. 부시는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캠페인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미래의 공격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그의 대통령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2001년 10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탈리반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탈리반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지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습니다. 부시는 광범위한 국제 연합의 지원을 받아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고, 지속 가능한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달 만에 탈리반 정권이 전복되었고,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Operation Enduring Freedom

그러나 탈리반은 저항 세력을 결집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장기적인 갈등으로 변하게 되었고, 미국의 개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은 당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장기화와 명확한 종전이 보이지 않으면서 비판을 받게 됩니다.

국토안보부의 창설

9/11 공격 이후, 부시는 국가의 안보 시스템을 강화하고 미래의 테러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대규모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의 창설이었습니다. 2002년, 이 새로운 부서는 여러 연방 기관을 통합하여 보안 위협에 대한 대응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국토안보부는 연방 비상 관리청(FEMA), 세관 서비스, 해안 경비대 등 여러 기관을 흡수하였으며, 주요 임무는 미국의 국경을 보호하고, 이민 관리를 강화하며, 사이버 보안을 개선하고, 자연 재해와 인위적 재해에 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조 개혁은 테러리즘에 대한 우려와 국가 방어 강화를 위한 필요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부시는 **미국 애국법(USA PATRIOT Act)**을 추진하였으며, 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연방 정부의 감시 및 법 집행 권한을 확대하는 법입니다. 법안의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테러리즘 방지의 필요성을 충족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비판자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가 침해되며 정부 권한이 과도하게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반발했습니다.


 

두 번째 임기 (2005–2009)

 

2004년 대통령 선거

2004년, 부시는 민주당 후보인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존 케리와 경쟁하여 재선에 도전했습니다. 선거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지속적인 전쟁, 부시의 경제 및 건강 관리 정책에 대한 논란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부시의 캠페인은 9/11 공격 이후의 리더십,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에 대한 결정, 그리고 국가 안보 문제에 대한 강력한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묘사하며, 케리를 우유부단하고 국가 안보 문제에 약한 후보로 그렸습니다. 사회적 이슈, 예를 들어 동성 결혼과 낙태 문제도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부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겨냥했습니다.

 

2004년 선거는 치열하게 경쟁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약 300만 표의 차이로 일반 투표에서 승리하였고, 선거인단에서 286표를 확보하여 케리의 251표를 초과하여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라크 침공

조지 W. 부시의 대통령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결정 중 하나는 2003년의 이라크 침공이었습니다. 9/11 공격 이후, 부시와 그의 행정부는 이라크가 사담 후세인 하에 있는 한 위협적인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알카에다와 연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3년 3월, 부시는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를 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고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프로그램을 해체할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작전,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은 대규모 공습과 지상 침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과 연합군은 신속히 사담 후세인 정부를 전복시켰고, 후세인은 나중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침공에 대한 정당성은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찾을 수 없었고, 침공 후 이라크는 분열과 종파적 폭력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란과의 관계에서 미국은 교훈을 얻었으나, ISIS와 같은 극단주의 그룹의 대두와 같은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와 불확실한 상황은 미국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 결정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부는 사담 후세인 제거가 도덕적으로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침공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결정이었으며 중동 지역의 안정을 해쳤다고 비판했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국내 정책 문제

부시의 두 번째 임기 중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2005년 8월에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였습니다. 이 허리케인은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허리케인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폭풍은 걸프 해안의 넓은 지역을 강타했으며, 특히 뉴올리언스에서 제방 시스템의 실패로 인한 대규모 홍수를 초래했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연방 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혼란스러우며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FEMA는 대응 조정에 어려움을 겪었고, 수천 명의 주민들이 루이지애나 슈퍼돔과 뉴올리언스 컨벤션 센터와 같은 장소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파괴의 이미지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부시 행정부는 무능함과 무관심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난한 지역사회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영향이 부각되었습니다.

 

부시는 뉴올리언스를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비판을 받았고, 이는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에 대한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Troubled Asset Relief Program(TARP)

2008년 금융 위기

부시의 두 번째 임기를 특징짓는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2008년 금융 위기였습니다. 이 위기는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적 하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위기는 주택 시장의 붕괴, 대규모 모기지 채무 불이행, 주요 금융 기관의 파산 등으로 촉발되었습니다. 2008년 말에는 미국 경제가 급락하였고, 주식 시장이 폭락하며 실업률이 상승했습니다.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문제 자산 구제 프로그램(TARP)을 포함한 긴급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연방 정부가 은행 및 기타 금융 기관의 부실 자산을 매입하여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TARP는 대중과 의회 내에서 많은 반발을 일으켰으며, 특히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를 월스트리트를 구제하는 정부의 개입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금융 위기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큰 경제적 고통을 주었으며, 부시의 승인율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금융 위기는 그의 대통령직 마지막 몇 달 동안의 활동을 압도하였고, 2008년 바락 오바마의 당선으로 이어졌습니다.


퇴임 후

 

퇴임 이후의 삶

조지 W. 부시는 2009년 1월 20일, 바락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퇴임했습니다. 퇴임 이후 그는 텍사스주 다라스에 거주하며, 자신의 재단과 자선 사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조지 W. 부시 재단은 교육, 글로벌 보건,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진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미국 전역의 군인을 위한 자선활동을 지원하며, 퇴임 후에도 공공 문제와 지역 사회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작가로서의 경력

부시는 퇴임 후 자신의 회고록인 "결단의 순간: 전쟁과 평화, 그리고 미국의 미래"를 집필했습니다. 이 회고록은 그의 대통령직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에 대한 개인적인 반성과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부시는 또한 "41: 내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같은 다른 저서도 출간하였습니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았고, 많은 개인적인 초상화와 역사적 장면을 그려왔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그의 개인적인 표현과 감성을 드러내며, 공적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회고록과 함께 그림 작업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가 남긴 것과 역사적 평가

 

외교 정책과 테러와의 전쟁

조지 W. 부시의 대통령직은 그의 외교 정책 결정, 특히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 그리고 국가 안보 접근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테러 대응 방식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몇 년간 재편하였으며, 글로벌 지정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라크 침공 결정은 특히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일부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이 지역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침공이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으며 중동 지역의 불안정을 초래했다고 비판합니다.

 

국내 정책과 경제 유산

국내 정책 측면에서, 부시의 대통령직은 세금 감면, 교육 개혁, 허리케인 카트리나 및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은 주요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세금 감면 정책은 경제 성장을 자극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국가 부채를 높인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부시 대통령직의 마지막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TARP와 같은 조치는 금융 시스템의 전면적 붕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과 금융 규제 실패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명성과 대중 인식

조지 W. 부시의 대통령직은 극도로 양분된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승인율은 임기 동안 크게 변동했습니다. 9/11 공격 이후, 그의 승인율은 90%를 초과했지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장기화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및 금융 위기와 같은 논란이 발생하면서 그의 인기 급락했습니다.

 

퇴임 후, 부시의 공적 이미지는 개선되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그가 퇴임 후 수행한 인도주의적 노력은 이 이미지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조지 W. 부시의 생애는 특권, 리더십, 논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가족 정치 왕조, 개인적 경험, 그리고 그가 재임 중 경험한 특별한 사건들이 그의 생애를 형성했습니다. 텍사스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전시 대통령 역할까지, 그의 유산은 여전히 논의되고 재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결정의 장기적인 영향은 전 세계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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